들어가는 말
넷플릭스에서 '폭삭 속았수다'라는 드라마 제목을 처음 봤을 때, 솔직히 조금 당황스러웠어요. '폭삭 속았다'는 건가? 누가 누구를 속인 이야기인가 싶었죠. 아니면 혹시 '폭삭 삭았다'는 의미로 뭔가 시들해진 이야기를 다루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하지만 드라마를 보고 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이 제목이 얼마나 깊고 따뜻한 의미를 담고 있는지를요.
오해하기 쉬운 제목,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진심
'폭삭 속았수다'는 제주어로 '수고 많으셨습니다'라는 뜻이에요. 제주 방언을 모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처럼 완전히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기 쉽죠. 표준어에서 '속다'는 누군가에게 기만당하거나 사기를 당한다는 부정적인 의미잖아요. 그런데 제주어에서 '속다'는 '애쓰다', '수고하다', '고생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된다고 해요. 같은 발음, 같은 글자인데 의미는 정반대인 셈이죠.
그래서 '속았수다'는 고생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위로하는 말이에요. 거기에 '폭삭'이라는 강조 표현이 붙어서 '정말 많이 고생하셨습니다', '진심으로 수고 많으셨습니다'라는 의미가 되는 거죠. 이 얼마나 따뜻한 표현인가요. 누군가의 노고를 인정하고 위로하는 이 한 마디에는 제주 사람들의 정서가 고스란히 담겨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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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나무위키(https://namu.wiki) |
제주어가 만들어낸 드라마의 결
드라마를 보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제주 방언이 단순한 배경 설정이 아니라 드라마의 핵심적인 감성을 만들어낸다는 점이었어요. 아이유가 연기한 애순이와 박보검이 연기한 관식이가 주고받는 대사 하나하나에 제주어가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었죠.
"이 사름아", "혼디 말라", "무사 경 허우꽈" 같은 표현들이 그냥 스쳐 지나가는 방언이 아니라 인물들의 감정을 더욱 생생하게 전달해주었어요. 특히 감정이 격해지는 순간이나 가족 간의 대화에서 제주어가 나올 때면, 왠지 모르게 더 진실되게 느껴졌어요. 표준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제주만의 투박하면서도 따뜻한 정이 묻어나는 거죠.
저는 제주 출신이 아니라서 처음에는 대사를 완전히 알아듣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어요. 하지만 그게 오히려 좋았던 것 같아요. 자막을 통해 의미를 이해하면서도, 배우들이 내뱉는 제주어의 억양과 리듬 자체가 주는 감성을 느낄 수 있었거든요. 마치 낯선 언어의 노래를 듣는 것처럼,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도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경험이었달까요.
언어가 담아내는 삶의 무게
'폭삭 속았수다'라는 제목은 이 드라마가 다루고자 하는 주제를 완벽하게 담아내고 있어요. 드라마는 제주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애순이와 관식이가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죠. 그들의 삶은 결코 쉽지 않았어요. 가난, 좌절, 포기, 상실...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온갖 고난들이 그들을 덮쳤죠.
하지만 이 드라마는 그런 고난만을 강조하지 않아요. 오히려 그 모든 어려움 속에서도 묵묵히 하루하루를 살아낸 사람들에게 "폭삭 속았수다"라고 말해주는 거예요. 당신이 살아온 그 시간들, 당신이 견뎌낸 그 순간들, 그 모든 게 대단했다고, 정말 수고 많았다고 말이죠.
특히 인상 깊었던 건 드라마 말미에 애순이가 시집을 출간하는 장면이었어요. 그 시집의 제목이 바로 '폭삭 속았수다'였죠. 자신의 인생을,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들을, 그리고 그 모든 순간들을 되돌아보며 애순이가 내린 결론이 바로 이 한마디였던 거예요. 살아오느라 정말 고생 많았다고, 하지만 그래서 더 소중하고 아름다웠다고요.
영문 제목에 담긴 재치
드라마의 영문 제목은 'When Life Gives You Tangerines'예요. 이건 유명한 영어 속담 "When life gives you lemons, make lemonade"(인생이 레몬을 주면 레모네이드를 만들어라)를 재치 있게 변형한 표현이에요. 원래 속담은 신맛 나는 레몬 같은 시련을 달콤한 레모네이드로 바꾸라는, 역경을 기회로 삼으라는 의미잖아요.
그런데 제주에서는 레몬이 아니라 귤이 자라죠. 그래서 레몬 대신 귤(tangerines)을 넣은 거예요. 이게 단순히 지역적 특성만 반영한 게 아니에요. 귤은 레몬처럼 신맛만 나는 게 아니라 원래 달콤하고 맛있는 과일이잖아요. 즉, 인생이 주는 것들이 꼭 시련만은 아니라는 의미도 담겨 있는 거죠. 때로는 달콤한 순간들도 함께 주어진다는 것,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합쳐져서 우리의 인생을 만들어간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어요.
방언이 주는 보편적 공감
재미있는 건, 제주 방언이 오히려 더 보편적인 공감을 만들어냈다는 점이에요. 언뜻 생각하면 특정 지역의 방언을 쓰면 그 지역 사람들만 공감할 것 같잖아요. 하지만 '폭삭 속았수다'는 정반대였어요. 제주 출신이 아닌 사람들도, 심지어 외국 시청자들도 이 드라마에 열광했죠.
왜 그럴까요? 제주어가 가진 특유의 억양과 표현들이 감정을 더 진솔하게 전달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표준어로 다듬어진 대사보다, 날것 그대로의 제주 방언이 오히려 더 리얼하게 느껴진 거죠. 그래서 시청자들은 제주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면서도 자신의 부모님, 자신의 고향, 자신의 삶을 떠올릴 수 있었던 거예요.
언어는 문화이고, 문화는 사람이다
'폭삭 속았수다'를 보면서 언어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달았어요. 단순히 의사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의 정서와 문화, 그리고 삶의 방식까지 담겨 있는 거잖아요. 제주어의 '속다'가 '고생하다'라는 뜻으로 쓰인다는 것 자체가, 제주 사람들이 얼마나 고된 삶을 살아왔는지, 그래서 서로의 노고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아요.
드라마를 다 보고 나니 '폭삭 속았수다'라는 제목이 정말 완벽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처음에는 의미를 몰라서 의아했지만, 알고 나니 이보다 더 이 드라마를 잘 표현하는 제목은 없을 것 같거든요. 제주의 언어로 제주의 이야기를 담아내면서, 동시에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된 거죠.
나가는 말
'폭삭 속았수다'는 제목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모든 것이 살아온 날들에 대한 위로였어요. 드라마를 보고 나서 제 삶도 돌아보게 되더라고요. 힘들었던 순간들,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들, 그래도 견뎌낸 그 모든 시간들에게 저도 한마디 해주고 싶어졌어요.
"폭삭 속았수다."
당신도, 저도, 우리 모두 정말 수고 많았다고요. 살아오느라 고생했다고, 그래서 고맙다고 말이에요. 이 따뜻한 제주어 한 마디가 이렇게나 큰 울림을 주는 드라마를 만들어냈다는 게 참 대단하지 않나요?

